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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08.18.
  • 인천 시민 수백 명이 오후 6시경 애관극장 앞길에서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만세 삼창을 외치며 내동 사거리를 거쳐 일본인 마을로 행진
    조봉암, 1월에 예비구금령으로 구속돼 헌병대 감방에 갇혔다가 석방됨. 8월 16일 인천보안대 조직
  • 1945.09.08.
  • 인천항에 입항하는 미군 환영행사 자리에서 경비를 담당하던 일본인 경찰관이 환영시위 군중에 발포. 노동조합 인천중앙위원장 권평근, 보안대원 이석우 등이 현장에서 사망하는 등 14명의 사상자 발생
  • 1945.09.10.
  •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 9월 8일 인천항 미군 환영행사장에서 일본인 경찰관의 발포로 사망한 권평근·이석우의 장례식을 시민장으로 치름
  • 1945.10.06.
  •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 미군정이 실시되고 신임 인천시장과 인천경찰서장이 임명되자 ‘시장과 서장 선거는 시민의 총의’에 따라 선출돼야 한다고 밝히고 4대 요구사항 제기
  • 1945.10.07.
  • 인천실업자동맹, ‘용운정(龍雲町)’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여 위원장 등을 선출하고 강령 채택. 위원장에 송봉기, 부위원장에 이두문 선출
  • 1945.10.11.
  •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 발전적 해체를 하기로 결정하고 인천시 인민위원회 창립준비위원회를 인천영화극장 내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 사무소에서 개최. ‘인천시정(仁川市政)은 인천시민의 힘으로’라는 표어 아래 ‘정강’과 ‘시정방침’ 결정
  • 1945.10.16
  •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 오후 1시 인천영화극장 내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 사무소에서 인천시 인민위원회 결성. 조선인민중앙위원회 최용달·박석하 등과 조봉암, 김용규, 박남칠 등 200여 명이 참석. 위원장에 김용규, 부위원장에 박남칠, 상무위원에 이보운을 선출하고 결의문 채택.
  • 1945.10.18.
  • 제물포시내 33개 이발업자들, 이발 요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 시작. 기존 요금인 대인 기준 1원 50전을 2원 50전으로 올릴 것을 요구하였으나 보안서장이 2원 인상만을 승인하자 전면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 10월 19일, 2원으로 타협한 후 업무 개시함
  • 1945.10.19.
  • 조선영사기술종업원동맹 인천지부 결성식이 35명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영화극장에서 거행됨
  • 1945.10.25.
  • 고려청년당 인천지부, 인천자유노동조합 창설. 한국민주당 인천지부 간부로 있던 유창호가 노동조합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으나 부두노동 경험이 많은 임귀섭을 추천해 위원장으로 선출함
  • 1945.10.27.
  • 인천지구노동조합, 인천실업자동맹회관에서 자동차 운전수들을 대상으로 교통노동조합 결성대회 개최
  • 1945.11.01.
  • 인천교육자동맹, 창영학교 강당에서 8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총회 개최. 이 날 김학경(金鶴經) 외 15명의 위원을 선출하고 선언과 강령 등을 채택함
  • 1945.11.05.
  • 인천시 인민위원회, 위원회를 개최하고 부서와 임원 결정
    ‘인천지구 노동조합평의회’ 대표·금속노조·토건노조·식료품노조·실업자동맹·자유노조 등 8개 노동단체 대표들이 인천시청 제2회의실에서 시장, 상공과장 등과 함께 ‘노동회의’ 개최
  • 1945.11.08.
  • ‘인천지구 노동조합평의회’, 광통사(廣通社)에서 좌담회 개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개황 보고’(주재복), ‘38도 이북의 실황보고’(안철욱), ‘인민공화국과 인민의 임무’(이승엽) 등을 발표
  • 1945.11.10.
  • 경기도 인민위원회 결성식 개최. 박남칠이 부위원장, 이보운이 산업부 차장 등으로 선출
    부녀동맹 인천지부, 김조이가 주간이 되어 결성 준비를 진행 중 ‘선언’과 ‘강령’ 발표
  • 1945.11.11.
  • 인천지구 노동조합평의회, 창영학교 대강당에서 「소련혁명기념일 기념강연회」 개최
    부녀동맹 인천지부, 오후 1시부터 창영학교 강당에서 시국대강연회 개최
    유두희 사망. 대중일보는 ‘인천노동사상에 잊지 못할 무산계급투사’라고 호칭함
  • 1945.11.25.
  • 자유노동조합·부두노동조합·염업운수노동조합·자동차교통노동조합 인천분회 등 인천지역 4개 노동조합이 참가하여 무덕관에서 ‘조선교통운수 노동조합 인천지부’ 결성식을 개최하고 21명의 집행위원 선출
  • 1945.11.27.
  • 조선인민당 인천지부 결당식이 인천실업자대책위원회 사무실에서 개최됨
  • 1945.11.28.
  • 인천 신문·통신사 현역기자 20여 명으로 구성된 인천신문기자회, 흥업회사 2층에서 결성식 개최. 의장에 대중일보사 편집국장 엄흥섭을 비롯 상임위원을 선출한 후 선언·강령을 채택하고 폐회. 이 날 ‘대한민국임시정부환영준비위원회’ 발기인 가담 여부에 대해 무기명 투표를 진행한 결과 부결됨
  • 1945.11.29.
  • 부인(富仁) 농민조합, 영화여학교 강당에서 창립총회 개최. 인천시와 부천군에 걸쳐 조합원 총수는 3105명에 달함. 인천시 인민위원회 박남칠, 노조평의회 김기양, 교통노조 박정하, 실업대책위원회 조봉암 등이 참석해 축사를 함
  • 1945.11.30.
  • 조선혁명자구원회(朝鮮革命者救援會) 인천지부, 내리교회에서 결성식을 개최하고 임원 선출. 사무소는 ‘본정(本町) 4정목(丁目)’ 전 정자옥(丁子屋)에 마련함
  • 1945.12.03.
  • 인천공설운동장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환국봉영대회」 개최. 시민 2만여 명이 참석해 ‘임시정부를 절대 지지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상인천역까지 시가행진 전개
  • 1945.12.14.
  • 인천문학동맹 준비위원회, 문예탑사(文藝塔社)에서 준비위원회를 개최하고 결성대회 개최 계획 마련
  • 1945.12.15.
  • 인천자유노동조합 소속 화수동 소재 신탄육양장(薪炭陸揚場) 노동자 60여 명, 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며 동맹파업 돌입.
  • 1945.12.16.
  • 인천청년동맹, 무덕전(武德殿)에서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결성대회를 개최하고 임원 선출 및 ‘4대 결의문’ 발표
    부녀동맹 인천지부, 창영학교 강당에서 임시총회를 개최하고 위원장에 박창례, 부위원장에 김조이, 위원 이복연 외 26명을 선출
    조선출판노동조합 인천지부 결성. 인천지역 인쇄 직공들이 주축이 되어 신정(新町) 삼일상회(三一商會) 2층에서 결성식을 열고 김수근(金壽根)을 임시의장으로 선출.
    전인천고려불교회 총본부 혁명투사영령제위원회, ‘혁명투사영령제’ 거행
  • 1945.12.20.
  • 조선출판노동조합 인천지부, 삼일상회에서 제1회 집행위원회를 열고 부서와 임원을 결정
  • 1945.12.21.
  • 인천문학동맹, 문예탑사(文藝塔社)에서 임시총회 개최. 선언·강령·규약을 제정하고 기관지로 인민문학(人民文學)을 발간하기로 결정
  • 1945.12.29.
  • 인천시 각 동회장들, 동회장 회의가 끝난 후 인천시내 명월관에 모여 신탁통치 반대 결의문 발표
  • 1945.12.30.
  • 인천청년동맹, ‘근로대중의 위안’을 목적으로 인천음악동맹과 인천교육자동맹이 출연하는 「근로자 음악의 밤」을 창영초등학교 강당에서 개최
  • 1945.12.31.
  • 인천국립중앙관상대를 포함한 남한 전역의 관상대가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전개하며 파업 돌입
  • 1946.01.08.
  • 인천군정청, 파업 소요의 여파를 수습하기 위해 인천지역 일대에 오후 10시부터 오전 5시까지 잠정적인 통행제한 실시
  • 1946.01.10.
  • 경성전기주식회사 인천지점 전공회(電,工會) 결성식 개최
  • 1946.01.20.
  • 조선과학자동맹, 창영학교에서 ‘신탁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라는 주제로 강연회 개최
  • 1946.02.07.
  • 민주주의민족전선 인천시위원회, 인천시 인민위원회 회의실에서 각 단체 대표, 동회장, 지역 유지 등 약 13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발족식 개최
  • 1946.05.01.
  • 광복 후 인천지역의 첫 메이데이 기념식이 도원동 공설운동장에서 개최됨. 인천지역 60여 개 노동단체 참가. 동양방적공사 노동자 900여 명이 메이데이 행사에 참석하자 회사 측에서 메이데이에 쉬는 대신 5월 5일 대체근무를 지시. 노동자들이 이를 거부하자 회사 측은 노동조합위원장 윤한수 외 3명을 태업을 한다는 이유로 경찰에 넘김. 이에 격분한 노동자들이 회사 측에 즉시 석방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회사는 오히려 경찰을 불러 노동자 8명을 검거함.
  • 1946.05.07.
  • 인천 주둔 미군 CIC가 인천신문사를 기습하여 간부들을 체포하고 다수의 문서 압수
  • 1946.05.08.
  • 동양방적공사 인천공장 노동자 700여 명, 처우 개선 등을 요구하며 파업 돌입. 파업에 참가한 인원 중 450여 명은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 서울 사무실에 머물며 본사를 상대로 농성 전개. 이들은 ‘8시간 노동제, 현 일당 2원 50전을 15원으로 인상, 물가수당 지급, 공휴일 유급제’ 등을 요구.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는 6월 5일 동양방직 사장에 항의문 발송
  • 1946.05.19.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인천지부, 인천공설운동장에서 「독립전취(獨立戰取) 인천시민대회」 개최. 대회가 끝난 후 서울에서 내려온 반탁학생전국총연맹원 70여 명과 인천지역 노동조합원들 사이에 격투가 벌어져 10여 명이 부상을 당함. 인천지역 노동조합원 5명에 대해서는 「군정법령 제72호」가 적용돼 6월 6일 징역 90일, 벌금 3500원 등의 언도가 내려짐
  • 1946.05.31.
  • 동양방적 인천공장 남녀공원 500여 명, 대우개선과 해고된 노동자 17명의 복직을 경영주에 요구하였으나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시청에 몰려가 시장에게 호소
  • 1946.06.11.
  • 민주주의민족전선 인천지부장 조봉암, 인천 CIC에 검거되어 구속됨. 6월 22일 석방
  • 1946.06.23.
  • 민주주의민족전선 인천지부, 인천공설운동장에서 「미소공위 속개 촉진 인천시민대회」 개최. 이 자리에서 인천지구 노동조합 위원장 김기석이 인천 CIC의 명령을 받은 인천경찰서 정보계원에게 체포됨. 이날 인천시민대회장과 각 관공서, 신문사 등에 조봉암 명의의 성명서가 배포됨.
  • 1946.07.06.
  • 천차륜(仁川車輪) 노동자들,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 분회 결성식 거행
  • 1946.07.13.
  •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 인천자유노동조합 지부 결성.
  • 1945.08.03.
  • 동양방적 인천공장 노동자들,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를 탈퇴하고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 가입
  • 1946.08.11.
  • 기독교청년회 인천시연합회(기청 인천연합), 제2공회당에서 시국대강연회 개최.
  • 1946.09.01.
  •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 인천연맹 결성식이 이승만이 참석한 가운데 답동 에서 개최됨. 위원장에 유창호 선출
  • 1946.09.07.
  • 경성전기주식회사 종업원회 인천지회 결성식 개최
  • 1946.09.28.
  • 경성전기주식회사 인천지점 노동자 3000여 명, 총회를 열고 5개조의 요구사항을 제시하며 총파업 시작.
  • 1946.10.01.
  • 조선강업 노동자 130여 명, ‘해고절대반대, 가족수당 1인당 600원 지급’ 등을 요구하며 파업 돌입
    조선기계제작소 노동자 1000여 명, 파업 돌입
    조선종연(鍾淵)공업 노동자 80여 명, 파업 돌입
  • 1946.10.02.
  • 조선차륜(朝鮮車輪) 노동조합 조합원 300여 명, 조선기계제작소와 조선제동소(朝鮮製銅所) 노동자들과 함께 조선차륜공장 안에서 일하던 600여 명의 노동자들을 공격. 3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400여 명이 국방경비대 등에 의해 체포됨
  • 1946.10.03.
  • 인천항만을 포함한 남한 내 주요 항만 선원 1만여 명, ‘실업선원의 생활보장, 적산 선박의 민주관리 확립, 물가수당 2000원 지급’ 등 12개조의 요구사항을 내걸고 총파업 단행
  • 1946.10.06.
  • 신원불명의 청년 50여 명이 인천시 민주청년동맹, 민주주의민족전선 인천지부, 인민당 인천지부 및 휴간 중인 인천신문사 등을 습격하여 약 15명의 부상자 발생.
  • 1946.10.08.
  • 인천군청장관, 파업 소요의 여파를 수습하기 위해 오후 10시부터 오전 5시까지 잠정적인 통행제한 실시
  • 1946.10.14.
  • 조선기계제작소 노동자 700여 명 해고당함. 당시 조선기계제작소에는 1000여 명 정도가 근무 중이었음. 해고 노동자들은 인천시 노무조정위원회에 항의서를 제출함
  • 1946.10.20.
  • 금곡동 시장에서 군중 수백여 명이 ‘쌀을 달라, 정권을 인민에게 넘겨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30여 분간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에 의해 해산 당함
  • 1946.12.24.
  • 철도파업으로 미 CIC에 검거돼 부평미군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민주주의민족전선 부의장 홍남표 석방
  • 1947.02.22.
  •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 인천연맹, 도원동 공설운동장에서 김구가 참석한 가운데 「반탁자주독립전취 신춘대회」 개최
  • 1947.02.23.
  • 전국학생총연맹 인천시지부 연맹원들이 인천을 방문하는 김구를 환영하기 위해 모여 있던 중, 민청(民靑) 회원 80여 명이 습격하여 폭행한 후 도주
  • 1947.03.13.
  • 인천신문 편집국장 엄흥섭에 대해 ‘사정에 의하여 해고한다’는 내용의 사고(社告)가 인천신문에 실림. 인천신문 기자단은 회사 내 결의를 거치지 않은 채 사장이 독단적으로 감행한 사건으로 보고 진상 조사에 착수. 엄흥섭은 이에 대해 성명서를 발표
  • 1947.03.17.
  • 「3·1절 기념 인천예술제」가 준비되던 중, 경찰이 연극만 허가 신청이 완료되었다 하여 음악, 무용, 시낭독 등의 상연을 금지하고 기관총을 든 경관대가 출동해 출연 예정이던 윤기홍, 신현담, 김도인 등 6명을 연행함
  • 1947.03.21.
  • 경성전기주식회사 노동자들, 3월 21일~22일 이틀에 걸쳐 동맹파업 단행
  • 1947.03.22.
  •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 산하의 인천부두노동조합·조선제강회사·조선 알미늄 회사·인천자동차조합 노동자들이 오전 10시를 기해 총파업을 단행
    남로당 인천지부장 이보운, 남로당 선전부장 윤석준, 인천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용규, 민주주의민족전선 인천지부장 박남칠 등 40여 명, 파업과 관련해 인천경찰서에 체포됨
  • 1947.06.18.
  • 인천국립기상대 직원 170여 명, 기상대장에 불만을 품고 총파업 단행
  • 1947.09.07.
  • 인천경찰서가 미군 상대 성매매 여성을 적발할 때 삭발을 시키기로 결정했다는 내용을 경향신문이 보도함
  • 1947.11.17.
  • 인천경찰서, 11월 19일까지 인천지역 좌익 요인 30여 명 검거
  • 1948.01.27.
  • 인천부 직원 240여 명, 경기도 당국에 ‘가족수당 1인당 1000원’ 등 4개 항목의 요구조건을 제출
  • 1948.02.05.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인천지부·대한노동조합총연맹 인천연맹 등 20여 개 단체로 구성된 ‘한국독립전취 인천최고위원단’, ‘남조선만의 총선거 실시, 점령군 철퇴’ 등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에 제출
  • 1948.02.07.
  • 경기도, 인천지역 ‘공창(公娼)’을 폐지하기로 결정하고 성매매 여성 118명을 독립병원에 강제 수용시킴
  • 1948.02.15.
  • 인천지역 성매매 여성 80명, 인천도립병원에 수용됨
  • 1948.03.02.
  • 인천공립공업학교 학생들, ‘남조선단독정부 수립반대’를 요구하며 동맹휴업
  • 1948.03.19.
  • 경성전기주식회사 인천지점 노동자들, 서울 경성전기주식회사 노동자들의 파업에 호응하여 변전소 기술부원 50여 명을 제외하고 전원이 파업 돌입
  • 1948.04.10.
  • 인천부두노동조합 결성
  • 1948.04.30.
  • 남한단독총선거를 앞두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조봉암의 선전대가 부평에서 정체불명의 단체원에게 테러를 당함
  • 1948.07.20.
  • 인천지역 이발소에 고용된 배당제 종업원들이 업주들에게 수입배분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 돌입.
  • 1948.09.01.
  • 인천항 부두노동조합들, 하역청부권 쟁탈로 충돌
  • 1948.10.18.
  • 미군들이 인천에서 경찰과 선원에 권총을 난사
  • 1948.10.27.
  • 부평역 앞에 ‘삐라’가 살포되어 경찰에 수사에 나섬
  • 1948.11.16.
  • 부평 주둔 국군 군기대, 부평 근처 밭 속에 무기가 매몰되어 있다는 사실을 탐지하고 조사를 벌여 부평주둔 국군부대에서 80여 명의 ‘불온분자’를 체포해 서울 군기대 본부로 송치했다고 발표함
  • 1948.11.20.
  • 부평역 부근에서 ‘인민공화국 인천유격대’ 명의로 우익단체를 협박하는 문구가 수록된 ‘삐라’가 살포되어 부평경찰서가 조사를 진행함
    인천지역 서울 통학생 20여 명, 율목동 로타리 부근에서 ‘양군즉시 철퇴’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하다가 경찰에 의해 해산됨
  • 1949.02.21.
  •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경기도지부, 인천부청 정문 앞에 투서함 설치
  • 1949.02.25.
  •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경기도지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인천지부를 임시로 인천부청 회의실에 설치하고 조사관 2명을 임명
  • 1949.03.*
  • 인천자유노동조합과 인천부두노동조합, 합동준비위원회를 개최하고 대한노동총연맹 인천연맹 항만지구위원회로 통합 발족
  • 1949.03.05.
  • 인천부회의원 및 중추원 참의 등을 지낸 김윤복과 함경도 무산 등지에서 헌병보를 지내다 창영동에 거주하고 있던 이필순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인천지부에 찾아와 자수함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인천지부, 투서함 개함. 투서 건수는 40여 통으로 확인됨
  • 1949.03.15.
  •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인천지부, 일제강점기 고등경찰관을 지냈던 권오연을 시흥군에서 체포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인천지부, 송이원 체포
  • 1949.03.20.
  • 조선전업 부평송변전소 노총분회 결성.
  • 1949.03.21.
  •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인천지부, 김태훈.오경팔 체포
  • 1949.05.23.
  •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인천고려분회 회장 한능해 체포
  • 1949.05.24.
  •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인천지부, 일제강점기 부회의원을 지낸 이명호 체포
  • 1949.06.16.
  • 지하활동을 해오던 소위 ‘강화지구총사령관’ 이봉규, 유격대장 배상덕, 실천대장 한인 등 30여 명 등이 강화도에서 ‘6월 공세’를 표방하고 경찰지서를 습격.
  • 1949.08.29.
  • 인천경찰서, 남로당 인천시당 책임자 이용철 등 60여 명 체포
  • 1949.10.03.
  • 일제강점기 연안독립동맹원이자 해방 후 부녀동맹 간부를 역임하고 북로당 정치위원으로 있던 김명시, 부평경찰서에 구금된 지 이틀 만에 목을 매어 자살했다고 발표됨
  • 1949.10.14.
  • 월미관광회사 종업원 47명, 인천시 노동계에 미지급 급료와 봉사료를 지급받게 해달라는 내용의 진정서 제출
  • 1949.10.15.
  • 조선전업 노동조합, 회사 측이 노동조합 부위원장 김문규를 9월 21일부로 섬진강발전사무소 사무계장으로 인사 조치한 데 대해 노동조합 활동을 봉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반발하며 이 날까지 인사발령을 철회하지 않으면 반대투쟁을 전개할 것이라고 통보함
    국민보도연맹 경기도연맹 결성발기회가 인천검찰청 대법정에서 개최되고 결성준비위원회 구성
  • 1949.10.23.
  • 부천군 계양면 거주 권○○·권○○·김○○·강○○·권○○, 남로당 탈당 성명서 발표(대중일보에 게재)
  • 1949.10.26.
  • 강화군 선원면 거주 전○○·연○○, 농민조합 탈당 성명서 발표(대중일보에 게재)
  • 1949.10.30.
  • 국민보도연맹 경기도연맹 준비위원회, 제1공회당에서 국민보도연맹 경기도연맹 선포대회 개최. 당시 가입 규모는 인천 100여 명, 경기도 일원 100여 명, 총 200여 명
  • 1949.11.04.
  • 국민보도연맹 경기도연맹, 인천 제1공회당에서 선포대회 개최
    강화도 주민 40여 명, 정보국 방첩대원이라고 밝힌 외지 사람들에 의해 불법 구금, 취조당하는 사건 발생. 주민 중 한 명은 구타당하는 과정에서 사망함.
  • 1949.11.05.
  • 부천군 계양면 동양리 거주 김○○ 외 4명, 남로당 탈퇴 성명서 발표(대중일보에 게재)
  • 1949.11.28.
  • 민주주의민족전선 인천지부 의장 윤석준(尹錫峻), 인천경찰서 사찰계에 자수. 윤석준은 광복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경동 제2보안분대장과 ‘인위(人委)’ 산업부장을 거쳐 1947년 3월 ‘민전’ 의장에 선출되었으며 경찰을 피해 지방에 도피해 있던 중 자수함. 경찰은 윤석준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시키겠다는 의사를 밝힘
    경기도 내 보도연맹에 가입한 전향자 수가 이 날 현재 5440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됨
  • 1949.11.30.
  • 답동 거주 박○○, 남로당 탈퇴 성명서 발표(대중일보에 게재)
    송월동 거주 박○○, 남로당 탈퇴 성명서 발표(대중일보에 게재)
  • 1949.12.03.
  •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거주 송○○, 민주학생연맹 탈퇴 성명서 발표(대중일보에 게재)
  • 1949.12.04.
  • 국민보도연맹 인천시연맹, 오전 11시 40분 신흥초등학교 교정에서 1000여 명의 연맹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선포대회 개최. 국민보도연맹 경기도연맹 총무부장 이보운의 취지서 및 맹서서 낭독, 국민보도연맹 경기도연맹 부위원장 박남칠의 환영사 및 맹원의 선서서(宣誓書) 낭독 등이 진행됨. 대회 후 이마에 태극(太極)과 ‘공타(共打)’라고 적은 두건을 두르고 ‘통일국가 건설하자’는 플래카드를 앞세운 채 시가행진 전개
  • 1949.12.06.
  • 인천시청에서 걸인들을 구제하기 위한 대책위원회가 열려 일반 양민에 폐를 끼치니 집단수용이라도 해서 악폐를 없애자는 취지의 회의 진행
  • 1949.12.07.
  • 화평동 거주 이○○, 남로당을 탈퇴하고 국민보도연맹의 일원으로 대한민국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내용의 탈퇴성명서 발표(대중일보에 게재)
  • 1949.12.08.
  • 덕적면 거주 송○○ 등 14명, 공동 명의로 남로당 탈퇴성명서 발표(대중일보에 게재)
    숭의동 거주 정○○, 남로당 탈퇴성명서 발표(대중일보에 게재)
  • 1949.12.10.
  • 부천군 소사읍 소사리 거주 이○○, 남로당을 탈퇴하고 국민보도연맹의 일원으로 대한민국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내용의 탈퇴성명서 발표(대중일보에 게재)
    의동 거주 이○○ 등 2명, 좌익계열에서 탈퇴하고 국민보도연맹의 일원으로 대한민국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내용의 탈퇴성명서 발표(대중일보에 게재)
    림동 거주 황○○, 좌익계열에서 탈퇴하고 국민보도연맹의 일원으로 대한민국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내용의 탈퇴성명서 발표(대중일보에 게재)
    송림동 거주 임○○,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를 탈퇴하고 국민보도연맹의 일원으로 대한민국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내용의 탈퇴성명서 발표(대중일보에 게재)
  • 1949.12.12.
  • 국민보도연맹 부평연맹 선포대회가 오후 1시 부평공회당에서 개최됨
  • 1949.12.14.
  • 강화군 선원면 냉정리 거주 권○○, 농민조합을 탈퇴하고 국민보도연맹의 일원으로 대한민국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내용의 탈퇴성명서 발표(대중일보에 게재)
  • 1949.12.16.
  • 신흥동 거주 이○○·만석동 거주 심○○, 좌익계열에서 탈퇴하고 국민보도연맹의 일원으로 대한민국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내용의 탈퇴성명서 발표(대중일보에 게재)
  • 1949.12.19.
  • 송림동 거주 허○○, 민주학생연맹을 탈퇴하고 국민보도연맹의 한사람으로 맹약하겠다는 내용의 탈퇴성명서 발표(대중일보에 게재)
  • 1949.12.20.
  • 간석동 거주 홍○○, 남로당 탈퇴성명서 발표(대중일보에 게재)
  • 1949.12.24.
  • 학익동 거주 이○○·이○○, 좌익계열에서 탈퇴하고 국민보도연맹의 일원으로 대한민국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내용의 탈퇴성명서 발표(대중일보에 게재)
  • 1949.12.26.
  • 송현동 거주 박○○·박○○, 남로당 탈당 성명서 발표(대중일보에 게재)
  • 1949.12.28.
  • 송림동 거주 강○○, 남로당을 탈퇴하고 국민보도연맹원의 일원으로 대한민국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내용의 탈퇴성명서 발표(대중일보에 게재)
    송림동 거주 김○○, 민주학생연맹을 탈퇴하고 국민보도연맹원의 일원으로 대한민국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내용의 탈퇴성명서 발표(대중일보에 게재)
    화수동 거주 김○○, 민주학생연맹을 탈퇴하고 국민보도연맹원의 일원으로 대한민국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내용의 탈퇴성명서 발표(대중일보에 게재)
  • 1949.12.30.
  • 인천시, 시내 부랑자 수용 사업 시작. 이날 70여 명이 인천제생원에 수용됨. 인천시 당국은 강제로 부랑자를 수용한 것이 아니라 자원에 의한 것이라고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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